개요
요즘 이 곳 저 곳에서 많이 접해볼 수 있는 논리이죠.
"OO이 XX가 아님을 증명해라!"
우리는 이러한 말을 접했을때 반박을 시도하기 전에도 온몸에 힘이 쫙 빠져버리곤 합니다.
분명히 내가 느끼기엔 성립조차 안하는 단어들의 집합인데 반박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아주 예전, 저 멀리 중세 유럽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악질 가불기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오늘 제목에 늘어놓은 '악마의 증명(부존재의 증명), 러셀의 찻주전자, 내 차고 안의 용,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이 대체 무슨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앞서 말했던 'OO이 XX가 아님을 증명해라!' 라는 논리와 무슨 상관인지 한번 떠뜰어보겠습니다.
악마의 증명(부존재의 증명)
일일히 괄호 붙이기 귀찮으니 앞으로 악마의 증명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만약 악마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과연 악마는 존재하는 것인가?"
당신은 평범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햇빛은 따갑지 않게 땅을 적당히 비추고 있네요. 이런 날씨라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던 당신은 사거리 앞 횡단보도에 섭니다. 신호가 아직 바뀌지 않은 틈을 타 주변을 둘러보니,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악마는 존재한다!”
순간, 그 소리가 귀에 파고듭니다.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길 한쪽에서 남자가 열띤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궁금증에 이끌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악마는 우리 곁에 있다!”
호기심이 동한 당신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겁니다.
“저기, 혹시... 악마를 직접 보셨나요?”
남자는 마치 이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아뇨.”
당신은 약간 당황하며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악마의 목소리를 들으셨나요?”
“아뇨.”
당신은 이번엔 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더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그럼 폴터가이스트나 그런... 이상한 현상이라도 겪으셨나요?”
남자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대답합니다.
“아뇨.”
당신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궁금하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악마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뜻 아닌가요?”
남자는 이번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진지하게 눈을 마주치며 대답합니다.
“당신이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대보세요. 만약 대실 수 없다면, 악마는 존재하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확신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그 논리에 대한 정확한 문제점을 짚지 못한 채, 약간 열받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딨어요? 당신이 먼저 악마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자는 다시 그 태연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 있어요? 그러면 존재하는거죠.”
당신은 순간적으로 멍해집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건 알겠지만, 대체 뭐가 문제인지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정리가 되질 않네요. 점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남자는 아예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아, 시간 낭비했구나.'
한숨을 쉬며 남자를 무시하고 뒤돌아섰을 때, 당신은 방금까지 파란불이었던 횡단보도가 빨간불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거리 횡단보도라서 신호가 바뀌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오늘같이 기분 좋던 날도, 결국 다 잡쳐버렸네요.
이야기는 잘 읽으셨나요?
굳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악마의 증명'이라는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불합리한 감정과 오류를 체감시켜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뭔가 서양 서적을 번역한 책을 읽어보면 개념 설명하기전에 꼭 이런 이야기를 동봉하곤 하더라구요. 말투도 꼭 이러고 굳이 구구절절한 상황을 붙이는 것 마저도 좀 챙겨보려고 했습니다. 이런거 쓰는거 나름대로 재밌네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악마의 증명이 무엇인지 이해하셨다면 당신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아무튼 악마의 증명이란 다음 이야기와 같이 부존재의 증명이 불가능함을 이용하는 악질적인 논리입니다.
존재함을 증명하는건 증거가 존재하는 한 매우 쉽습니다만, 부존재함을 증명하는건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만약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 우주를 샅샅이 뒤진다고 해도 절대로 부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잖아.' 라고 해버리면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조금 과격한 성향을 지닌 유신론자들에 의해 많이 기용되곤 합니다.
'신이 존재함을 증명할 순 없지만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너는 이걸 부정할 수 없다.' 라는 것이죠.
유죄추정의 원칙
살짝 덧붙이자면 유죄추정의 원칙과 어느정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유죄추정의 원칙이란 무죄추정의 원칙의 파생어로 아직 죄가 판결되지 않았는데 거의 유죄로 취급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억울하게 잡혀왔는데 유죄추정의 원칙을 지키며 수사를 하는경우 당신은 당신이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거 완전 부존재의 증명과 똑같죠?
러셀의 찻주전자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도자기 찻주전자가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로 돌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찻주전자가 너무 작아서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발견할 수 없다고 덧붙이기만 한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러셀... 뭔가 익숙한 이름이에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바로 저번 글인 [수학] | 공리적 집합론과 체 에서 소박한 집합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역설의 주인이였군요. 철학자기도 했네요, 이 사람.
각설하고, 러셀의 찻주전자는 악마의 증명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종교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거 다 재치고 러셀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신론자들은 신을 증명하는 일을 무신론자에게 떠넘기곤 한다. 굉장히 잘못됐다. 헛소리다.'
조금 각색이 있지만 전체적으론 맞는 말일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바로 위에 따옴표 문장에서 조금 덧붙여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내 주장은 반박할 수 없으니, 인간의 이성이 그걸 의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오만이다"라고 말하고 이 것을 반복한다면 나는 당연히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찻주전자의 존재가 고대 서적에 기록되어 있고, 매주 일요일마다 신성한 진리로 가르쳐지며, 학교에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졌다면, 그 존재를 믿기를 주저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만일 과거였다면 이단 심문관의, 현대라면 정신과 의사의 열렬한 관심을 받을 것이다.'
적고보니 참 긴데 별내용 없으니 한번씩 읽어주세요.
그래도 요약해보자면 '내가 우주를 날아다니는 요상한 찻주전자로 종교를 만들어도 너네는 그럴듯한 증거만 있으면 믿을거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겁니다.
이 러셀의 찻주전자 라는 것은 '반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증명책임'은 바로 반증할 수 없는 것을 믿고있는 당신네들한테 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지 없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그것이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절대로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내비치는건 아닙니다. 진짜로요.
내 차고 안의 용
"저희 집 차고에는 불을 뿜는 드래곤이 살고 있어요."
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고 당신은 제 말을 듣고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몇세기 동안 드래곤이 담긴 이야기는 서적에서 계속해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얼마나 귀한 경험입니까?
당신은 저를 따라 저의 집, 차고로 오게됩니다.
제가 차고 문을 열자 당신은 차고 내부를 훑어보기 시작합니다. 사다리, 빈 페인트 통, 먼지 쌓인 세발 자전거...그리고 아무것도 없군요.
"드래곤은 어디있나요?'
당신은 물었습니다.
"여깄습니다." 저는 허공을 애매하게 허우적거리며 어느 한곳을 가르킵니다. "드래곤이 투명하다고 말해준다는걸 까먹었네요."
당신은 밀가루를 바닥에 뿌려 드래곤이 발자국을 남기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좋은 생각인데요? 근데 이 용은 지금 날고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당신은 드래곤이 뿜는 불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감지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보이지 않는 불은 온도도 없습니다."
당신은 드래곤에게 페인트를 뿌려 모습을 드러내자고 말합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러나 이 드래곤은 실체가 없어서 페인트가 묻지 않아요."
이런식으로 제가 당신이 제안하는 모든 물리적 실험을 특별한 이유로 무효화 합니다.
이제 보이지도 않고 공중에 떠다니면서 열도 없는 불을 뿜어대고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과 완전히 무(無)의 상태와 다를 것이 뭘까요? 제 주장을 반박할 수도, 반증할만한 실험을 고안할 수도 없다면 제 주장을 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반박할 수 없는 주장과, 반증할수 없는 실험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에게 영감이나 경이로움을 줄 수 있지만 '진실' 로써의 가치는 전무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저 증거없이 제 말만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내 차고 안의 용'을 번역해보았습니다.
이쯤되면 드는 생각이 있으실겁니다. 지금 위에 나온거 다 똑같은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사실 다 똑같은거에요.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위에 어느정도 적혀있으니까요.
파파기아니스의 법칙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방금 위에서 설명했던 3개의 단어는 모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게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입니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즉, 어떠한 주장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 주장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법칙입니다.
네, 그냥 그렇다구요.
타조 증후군
이러한 논리의 오류를 본인이 알면서도 저지르는 이유는 타조 증후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조 증후군이란 간단하게 현실 도피입니다. 무언가 대응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때 대응대신 회피를 선택하는 그런 현상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 관리 차원에서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불어났을때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왔던 스트레스 관리 장벽 다 무너집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 저러한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을 들먹여도 '내가 그렇게 느꼈는데?' 라고 눈가리고 아웅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다' 라는 문제가 엄청나게 거대한걸 알면서도 논쟁 상대에게 그 거대한 문제를 해결해보라고 떠넘기며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본인이 원하는 정보만을 걸러듣게 됩니다.
본인도 이 논리가 반박이 불가능한 가불기인걸 알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대답을 못하면 못하는대로 논쟁에서 승리하는거고 (본인생각), 대답을 해도 부존재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니 논쟁에서 이점을 점할 수 있게되죠.
말그대로 정신승리라는 겁니다.
마치는 말
최근 이러한 사람을 만나서 논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참 말이 안통하다보니 글에 감정이 조금 담겨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이러한 화법은 건강하고 탄탄한 인간관계와 근처 친구들의 화병 예방을 위해 자제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갑자기 철학글이 쓰고 싶어져서 쓴 글입니다. 글 양식도 그냥 떠오른대로 쓴거라 지맴대로에요, 읽기 편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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